온 가족이 돌아가면서 투병 생활을 하고 있을 적에 둘째(제현)가 태어났다. 혹자는 뭐가 그렇게 바빠서 애를 만들었냐고 이야기하는 분도 있었다. 그 시절만 해도 백혈병이 재발하면 골수이식 외에는 살릴 방법이 거의 없었던 때라서 어떻게든 골수이식을 해줄 기증자를 찾아야 했는데 맞는 골수를 찾기란 수만 분의 1 정도로 쉽지 않았다. 의사의 이야기로는 형제끼리는 두 명에 한 명 정도 비율로 이식이 가능한 골수를 가지고 있다기에 만일의 가능성에 대비하여 둘째를 가졌던 것이다. 훗날 태어난 동생도 형을 살리기 위한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된다면 충분히 이해하리라 싶었다. 다행히 석현이는 수년간의 항암제 치료로 완치가 되었지만 문제는 엉뚱한 데서 발생했다. 나는 질병으로 죽음과 사투를 벌였던 형 대신, 동생이라도 좋은 대학에 가서 훗날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형의 부족함을 메워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둘째의 입장으로 봤을 때 커가면서 친가와 외가의 삼촌 및 사촌형제들이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라는 것이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 거기에다 부모의 기대가 큰 부담이 되었는지 제현이는 중학교 때부터 방황하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게임에 빠지고 급기야는 술과 담배를 하는 흔적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요즈음 둘째 녀석이 자신의 말썽 부리던 시절 이야기가 아버지가 쓰는 책에 자세히 기술되는 것을 막으려고 나에게 미소 공세를 보내고 있기에 아들의 체면을 위해서 짧은 글로 마무리 지을 예정이지만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나에게 준 것은 분명하다. 고2 때는 학교에 자퇴 신청까지 했으니…
내 삶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일들을 언급하라면 온 가족의 ‘죽음과의 입맞춤’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낸 것과 석현이를 대학 보내기 위해서 전 과목 가정교사를 한 것, 그리고 둘째 제현이의 6년간의 방황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제현이의 방황 때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마음의 병이 육체적인 병을 만들어서 6개월 동안 병원 통원치료를 받았을 정도였다. 어쨌든 우리 부부는 자식에 대하여 끝까지 끈을 놓지 않았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언젠가 바른길을 걸어가리라 확신했다. 그 후 제현이는 3수 끝에 간신히 전문대학에 턱걸이로 들어갔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방의 의무도 다했다. 군에 다녀온 후 복학한 이 후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학업에 최선을 다해서 좋은 성적으로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4년제 대학에 편입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또한 작년에는 귀엽게 생긴 아가씨를 사귀어서 결혼을 했는데 착한 성격의 며느리가 시부모와 같이 살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요즈음은 한 집에서 아들 내외와 세상 이야기도 하고 때로는 장난도 치면서 지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아들 내외와 같이 강원도의 천상화원 곰배령 등산을 다녀왔다. 자식 내외와 4시간 동안 땀 흘려가며 깊은 산속 길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음식도 나눠 먹으며 참 행복을 느꼈다.
제현이가 지금과 같이 바른길을 걸어가는 데 큰 영향을 주신 분이 제현이의 청담고 2학년 담임이셨던 정병근 선생님이었다. 나에게 자식이 말썽을 부리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부모의 자리를 지켜야 함을 일깨워 주신 분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제현이의 담임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해마다 드리고 있다. ‘서운함과 미움은 모래에다 새기고 감사에 대한 마음은 바위에 새기라’는 옛 성현의 말씀을 나는 항상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다. 감사하는 마음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자산이다.
얼마 전 제현이가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제가 말썽 부리던 시절에 아버지를 미워했었는데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시 바라본 아버지는 항상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던 저의 큰 바위 얼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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