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기 형! 졸업여행 신청 안했던데 빨리 신청하세요.” 3년 동안 전방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3학년으로 복학한 후 맞이하는 졸업여행 때였다. 그 시절 우리 집은 요즘 표현을 쓰면 전형적인 흙 수저 집안이었다. 장남인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의 전자공학과에 입학(외삼촌께서 숙식을 해결해 주셔서 가능했다.)한 이후에 누나는 다니던 대학을 중퇴해야 했고 여동생은 아예 대학 갈 엄두도 못했기에 부모님과 형제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인하여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 서울은 고향이었던 대구에 비하여 생활비가 상당히 많이 들었기에 나는 용돈이 늘 부족했다. 그랬기에 졸업여행으로 구미 전자공업단지와 경주를 거쳐서 울산공업단지와 부산 금성사(LG전자의 전신)를 탐방하는 졸업여행은 기업 현장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료들과의 우정나누기에도 좋은 기회였지만 가정형편상 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어 졸업여행을 신청하지 않았는데 과대표였던 상훈이의 그런 다그침 소리를 들었던 것이었다. 복학한 선배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도 같이 가고 싶지만 어렵게 학비를 보내는 어머니에게 졸업여행 비용 보내달라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구나.” 지금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아내는 대학 산악회 선후배 사이였는데 그 시절 나의 행색에 대하여 우리 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었다. “너의 아버지가 대학 다닐 적에 봄부터 초겨울까지 항상 같은 두꺼운 남방셔츠를 입고 다녔단다. 더운 여름에도 초겨울에 입던 옷의 소매만 둥둥 걷어서 입고 다니기에 짠해 보여서 내가 남방셔츠나 바람막이 등산복도 한 번씩 사주고 그랬어.” 그게 그 시절의 내 모습이었다.
언덕위의 교양학관이나 교육관에서 공학관까지 700~800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어떤 날은 하루에도 서너 번씩은 오르내려야 하고 학교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리포트를 쓰고 있다 보면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가끔 오후 4~5시에 친구가 학생식당에서 15원짜리 라면을 한 그릇 사주면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랬으니 3만 5천원을 내야 하는 졸업여행을 못가는 것은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는 당연했다. 그 시절 한 학기 등록금이 15만 원 전후였으니까… “형이 같이 못 갈 거라고 짐작하고 우리 동기들이 의논했는데 명기형을 졸업여행에 같이 가게 하자면서 졸업 여행비를 천 원씩 더 걷기로 했어요. 그러니 같이 가도록 해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기겁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후배들 밥을 사줘도 사줘야 하는 선배가 툭하면 후배들에게 신세만 지는데 졸업여행을 후배들 돈으로 간다니… 말은 고맙지만 나는 그렇게는 도저히 못가겠다.” 그 순간 상훈이가 화를 벌컥 내면서 말을 이었다. “형! 후배들이 얼마나 형을 편하게 생각했으면 다들 비용을 조금씩 보탰겠어요? 딴말 말고 후배들 성의를 생각해서 함께 가도록 해요. 여행사에 벌써 형 이름도 신청했어요.” 며칠 동안 상훈이의 윽박지름에 못 이겨서 나는 졸업여행을 함께 가게 되었다. 30명이 넘는 복학생 중에 유일하게 후배들이 모아준 돈으로… 그 졸업여행 중에 잊을 수 없는 이야깃거리가 만들어졌는데 마음이 따뜻했던 고마운 후배들이 아니었으면 어찌 이런 멋진 추억을 남길 수 있었겠나 싶다.
그 첫 번째 에피소드는 경주에서 있었다. 복학생 동기 중에 학도호국단 대대장(지금으로 치면 전자과 학생회장)을 맡고 있었던 재윤(미국 마이애미 거주)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경주에서의 첫날 밤 늦게까지 함께한 술자리에서, 내가 재윤이에게 대학 2학년 때 경주가 고향인 친구(과 친구인데 초등학교 졸업 후 막노동으로 6년을 보낸 후 독학으로 연대 전자공학과를 합격한 의지의 한국인이다. 강남 학원연합회 부회장을 했었고 지금 도곡동에서 학원을 경영하고 있다.)의 집에 놀러갔다가 둘이서 경주시내의 첨성대, 불국사, 석빙고, 안압지, 천마총 등을 자전거로 돌아다녔던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우리도 내일 자전거 여행을 하자고 나를 졸랐다. 그런데 졸업여행은 매일매일 스케쥴이 꽉 짜여 있고 자유시간이 따로 없어서 안된다고 했더니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자전거를 빌리자고 한다(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새벽 3시가 다되어가고 있었기에 한 시간 남짓 자고 일어나자는 의미였다.). 결과부터 이야기 하면 새벽 4시 30분에 부근의 자전거 가게 문을 무작정 두드렸다. 요즘 같아서는 크게 혼이 날 수도 있는 말이 안되는 짓을 했지만 주인아저씨는 성격이 무던하셨던지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서 학생증만 보고는 믿고 자전거를 2대 빌려주셨다. 자전거라야 변속 기어도 없는 고물 짐 자전거였지만 우리 둘은 신이나서 아직도 어둠이 깔려있는 경주 시내를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자전거를 탄 채 지나가면서 그냥 볼 수 있는 첨성대와 고분군, 안압지, 석빙고 등을 먼저 들렀고 불국사처럼 입장료를 내야 하는 곳은 나중에 들렀다. 그러다가 출발시간이 가까워져서 숙박했던 여관에 도착해보니… 나와 재윤이의 짐 보따리까지 다 챙겨서 모두들 현대자동차 견학을 위하여 울산으로 예정보다 앞당겨서 출발한 뒤였다. 우리 둘은 부랴부랴 시외터미널을 들러서 울산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휴대폰이 나오기 전에 있었던 이야기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버스 안에서 우리 둘은 지도교수님께 혼날 걱정을 하면서…
울산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학우들이 터미널 여기저기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인가 확인했더니 현대자동차 공장 견학을 위한 섭외에 문제가 있어서 공장 견학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끝내 우리는 현대자동차 공장을 구경도 못하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다행히도 나와 재윤이가 경주에서 울산 오는 버스에 탑승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도교수님이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다. 부산행 버스 안에서 재윤이가 오늘 있었던 경주 자전거 여행 무용담을 까발리는 바람에 복학한 동기들 사이에서 왜 둘만 몰래 갔느냐고 난리가 났다. 그래서 다음날 새벽 부산에서는 동기 일곱 명이 함께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일찍 숙소에 당도한 해운대에서 부근의 자전거점에 미리 들러서 다음날 새벽 5시에 자전거 7대를 빌리기로 예약을 했다.
•원산폭격받은 악동들
저녁식사 후에 소주 한잔하러 나가려는데 과대표가 찾아와서 부산의 여대생들과 미팅을 하는데 남학생 3명이 부족하다면서 형들 중에 세 명만 미팅에 같이 가자고 졸랐다. 다들 복학생이 무슨 미팅이냐고 가기 싫어했지만 나는 상훈에게 졸업여행경비에 대한 빚도 있어서 따라나섰고 나의 종용으로 복학생 두 명이 미팅을 함께 했다. 미팅했던 내 파트너가 상당히 미인이라서 학우들의 부러움을 샀던 것 외에는 거의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그렇게 재미있는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거기다가 미팅에 참여 안한 복학생들이 툭하면 미팅장소(다방)에 왔다 갔다 하면서 복학생들을 빨리 나오라고 보채는 통에 예쁜 여대생과 몇 마디 대화도 제대로 못해보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미팅을 끝내고 나왔다.
그 다음날 이른 새벽에 우리 일곱 명은 달맞이 길로 해서 송정해수욕장 방향으로 자전거를 타고 올라갔다. 그런데 달맞이 고개에서 판단 착오로 문제가 생겼다. 다들 체력이 한창 때라서 달맞이 고개까지는 경사 길을 끙끙대면서도 잘 올라갔는데 달맞이 고개에서 다시 해운대로 내려오면 금성사 견학 출발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있을 것 같아서 반대편인 송정해수욕장 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달맞이 고개부터 송정해수욕장까지는 내리막 경사가 적당히 있어서 페달을 밟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자전거는 윙윙 소리를 내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신나게 내려갔다. 하지만 나중에 숙소가 있는 해운대로 오기 위해서 송정해수욕장에서 달맞이 고개를 올라오는 중간쯤에서 다들 체력이 소진되어버렸다. 어쩔 수없이 자전거를 끌고 2km가 넘게 남은 달맞이 고개까지 낑낑대며 올라온 후 고갯마루부터 해운대까지는 전력질주해서 내려갔는데도 졸업여행 팀은 이미 금성사를 향해 출발한 이후였다. 동기 중에 안정삼(삼성전자 연구소장을 역임했고 퇴임 후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군이 지도교수님의 가방을 항상 들고 다녀서 우리들이 ‘지도교수 가방모찌’(상사의 가방을 메고 따라다니며 시중을 드는 사람을 속되게 부르는 표현)라고 놀렸는데, 그 가방모찌까지 사라졌으니 발각이 안날래야 안날 수가 없었다. 지도교수님도 복학생들이 도와주고 솔선수범해주어서 졸업여행 지도교수하기가 편하다고 이야기까지 하셨는데 그런 사고를 쳐버린 것이다. 졸업여행 온 일행을 놓쳐버린 우리들은 약간은 불안해하면서도 해운대 모래사장을 기웃기웃하면서 약장사 마술하는 것도 구경하고 시시닥거리며 지나가는 여인들 몸매 품평회도 하면서 오후 3시쯤 공장 견학 팀들이 도착할 때까지 신나게 돌아다녔다. 공장 견학 팀이 숙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들은 교수님의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든든하게 믿고 있었던 복학생이 일곱 명이나 사라졌으니… 화가 나셔서 얼굴이 벌겋게 되신 교수님 앞에서 우리는 고양이 앞의 쥐새끼 꼴이 되어 있었다. 교수님은 화가 풀리지 않으셨는지 방에 들어가셔서 나오시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우리들은 지도교수님 방에 들어가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빌면서 교수님의 긴 설교를 들었다.
그리고 졸업여행의 마지막 만찬시간! 아직도 화가 안 풀리신 상태로 저녁식사 장소에 오신 교수님으로 인하여 분위기는 썰렁했다.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제일 맏형인 한재복 형(형은 에너지 연구소에 근무하시다가 10여 년 전 암으로 작고하셨다.)이 나섰다. 재복 형이 “오늘 솔선수범해야 할 73학번 복학생들이 한 행동은 아주 부적절한 행동이었고 우리 모두를 실망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 이것으로 용서하고 지금부터 기분 좋게 만찬을 시작 합시다.” 그 순간 교수님이 만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큰 목소리로 일갈했다. “용서를 하기는 누가 마음대로 용서를 해” 그 순간 재복 형은 우리 7명의 이단아들에게 교수님을 달래기 위한 처벌을 내렸다. “7명 일어 서! 그 자리에 머리박아!”
•원산폭격의 전형
졸지에 우리는 선후배들 앞에서 원산폭격(뒷짐을 진 채 몸을 굽혀 머리를 땅에 박는 군대에서의 일종의 벌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들이 원산폭격 하는 것을 보신 교수님의 화가 풀리셨는지 우리에 게 일어나라고 하신 후에는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졸업여행의 마지막 만찬을 하는 도중에 교수님은 제자들이 마음껏 놀도록 하고 방에 들어가셨다. 하지만 도둑놈 제 발 저린 7명의 동기들이 방으로 가서 교수님을 모시고 자갈치 시장까지 택시를 타고 소주 한잔 하러갔다. 화가 완전히 풀리신 차 교수님과 복학생들은 술친구가 되어 거나하게 마셨다. 술 한잔하면서 차 교수님이 한 말씀 하셨다. “야! 이 친구들아! 가방모찌라도 두고 가야지 내 가방을 들어주던 친구까지 사라져버려서 내가 가방을 들고 다녔어.” 우리들은 늦은 시간까지 함께 술 한 잔 하고 기분 좋게 비틀비틀하시는 차 교수님을 부축해서 자갈치시장을 나섰다. 오래전에 있었던 그때 그 시절을 되돌아보니 벌써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교수님과 함께 흘러간 옛 노래를 흥얼흥얼 거리며 자갈치 시장을 나서던 장면은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서 불현듯 기억의 벽을 깨고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수학여행팀은 부산에서 해산을 했다. 일탈에 재미를 붙인 7명의 복학생들은 거기서 바로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유적지를 들렀다가 충무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고 돌아왔다. 지금이라도 나의 졸업여행에 도움을 준 상훈이(졸업 후 마산 수출자유지역 기업에 다녔고 지금은 호주로 이민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와 76학번 후배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술이라도 한잔 사고 싶은데 다들 삶이 바빠서 그런지 모이는 기회도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큰 비밀인데 여기서 발설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첫 날밤 경주에서 지도교수님까지 합세한 ‘섰다판’(차 일환 교수님은 제자들에게 특유의 친화력을 가지셔서 이런 자리에도 빠지지 않고 잘 어울리신다.)이 벌어졌다. 그동안 교수님이 제자들과 졸업여행 다니시면서 섰다판에서 돈을 잃은 적이 없으셨다는데 그날 처음으로 돈을 잃었다는 얘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은 못했지만 풍문에 들었다. 은사님의 돈을 딴 괘씸한 학생은, 평소에는 잡기를 하지 않다가 이날 어설프게 섰다판에 붙었던 ‘나’였다. 돈을 딴 덕분에 후배들 돈으로 간신히 졸업여행에 따라 간 내가 자갈치 시장에서의 술 한 잔과 택시비는 몽땅 내가 쐈다. 우리가 부산에서 교수님께 무지하게 혼이 난 것도 어쩌면 돈 잃으신 것 때문에 두 배로 더 화나셔서 그런 것은 아닌지 하고 혼자서 상상을 해본다.
졸업여행을 다녀온 후에 우연한 기회에 상훈에게 많은 복학생 중에 왜 하필이면 나의 졸업여행 비용을 대주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형은 후배들이 어떤 문제로 어려움에 직면하면 함께 걱정하면서 해결하려고 노력해 주기에 후배들이 형은 꼭 함께 졸업여행에 같이 가야 한다더라.”고 말했다. 3학년 가을 졸업여행을 다녀온 이듬해인 4학년 때 나는 복학생으로서는 드물게도 재학생들의 강요에 의하여 과대표까지 맡았었다. 가진 것 없이 늘 궁핍하게 지냈던 나에게 후배들이 보내준 따뜻함이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오늘의 나를 만드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제자들과 술 한 잔이라도 하실 때면 종종 그날 원산폭격 이야기를 하시면서 기분 좋게 너털웃음을 웃으시던 차 교수님의 모습이 기억이 남아 있다.
아! 부산에서 미팅했던 아리따운 여대생도 지금쯤 내 아내처럼 할머니가 되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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