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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칼럼



《사랑은 행동이다》프롤로그 서문을 대신하여_창백한 푸른 점(1/2)
18-11-23 15:25 1,614회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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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 서문을 대신하여

창백한 푸른 점



 나의 세 번째 책 『사랑은 행동이다』가 간신히 책 모습을 갖추고 세상에 나왔다. 이노비즈 협회장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 글을 쓰려다 보니 산고의 고통이 가장 심했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기업인이 짧은 어휘력으로 그동안 ‘도전’과 ‘열정’이란 제목으로 책 두 권을 썼었다. 글을 직업적으로 쓰는 작가가 아니라서 얼마 전에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의미에서 내가 쓴 책을 다시 읽어봤더니 역시나 수준 낮은 글로 인한 부끄러움이 글의 내용보다 먼저 다가옴을 느꼈다. 그렇지만 다른 측면으로는 기업경영으로, 협회장으로 바쁜 가운데서 썼던 책이라 내 삶의 버킷리스트 중 한 가지(평생에 책 두 권을 쓰겠다.) 목표는 달성하였고, 오래전에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싶어서 뿌듯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나의 두 번째 책 『열정』의 추천사를 써준 벗이 나에게 ‘사랑’이란 주제로 책 한 권을 더 쓰는 게 어떠냐고 충동질했다. 책 두 권을 쓰면서 받았던 정신적 고통이 너무 심했기에 한 권의 책을 더 펴냄에 대하여 강력한 거부의사를 표시했던 나에게 벗은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쓴 글의 밑바닥에는 인간 사랑이 깔려 있어.”

 그 이후에도 몇 분의 지인이 ‘사랑’으로 책을 한 권 더 쓰라고 권유를 하는 바람에 마음을 추슬러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건 힘들지만, 내 삶을 아우르는 사랑을 주제로 낸 책으로 인하여 우리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따뜻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힘을 내가며 조금씩 틈날 때마다 써 나갔다.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혹시라도 자화자찬의 글이라고 생각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에 쓴 글의 대부분은 아내를 포함해서 가까운 지인(산악부 선후배, 벗, 사회 선후배)들이 곁에 있으면서 지켜봤던 내용들이다. 교정에 교정을 수십 번 거듭하면서 과장을 하지 않고 사실에 준하여 이성적으로 글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이 책은 보편타당한 사랑에 대한 내용은 아니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읽으면서 부정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업체 경영자이고 가족도 있는 사람이 왜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나 가치관에서 나하고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행동이다』를 읽는 분들이 내가 ‘느낀 사랑’ 혹은 ‘행동으로 옮긴 작은 사랑’을 ‘그 괜찮은 일이군.’ 혹은 ‘이런 행동도 사랑이구나.’ 하고 맞장구를 쳐주신다면, 그것만 가지고도 내가 책을 펴낸 의미는 충분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부 종교와 독선적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사는 지구촌을 위기와 공포에 빠뜨리고 있다. 가치관이 다르다고 해서 서로 증오하고 그 증오를 행동에 옮겨 피비린내 나는 살육 행위를 하는 세력 혹은 사람들도 있다. 그게 정상이고 인간다운 짓인가? 대의(大義)를 위해서 작은 것을 희생한다고 해도 그들에게서 인간적인 따뜻함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작은 사랑, 가령 이웃과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사랑이 충분하다면, 그것을 사회로 확대시켜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철학자도 아니고 글 쓰는 문인도 아니지만, 내가 생각하는 작은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고자 노력했던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싶다. 그런 작은 사랑에 대하여 이 책을 읽으시는 독자 중에 몇 분이라도 동의해 주신다면 나의 사랑은, 그리고 내 책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어머니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보여주셨다. 자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특별히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냥 어머니는 하시던 대로 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사람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게 나에게는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것이 자식교육 방법이 아니고 무엇이랴!


2권 『열정』에 나오는 어머니의 인간사랑 이야기를 언급하겠다.


“명기야! 지금 자지 않고 있으면 부엌에 잠시 나오너라.”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길고 긴 겨울방학 동안 실컷 놀다가 개학을 앞두고 방바닥에 엎드려서 밀린 방학숙제를 하다 어머니의 부르심으로 부엌에 갔을 때는 밤 11시가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 대한 교육비는 말할 것도 없고 생활비까지 보태지 않았고 어쩌다가 돈이 생기면 노름판으로 쫓아다니는 판이라 어머니는 생활비와 다섯 자녀의 교육비를 힘들게 혼자서 감당하셨다.


 낮에는 교동시장에서 옷가지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외제 화장품을 외상으로 구입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분을 찾아다니시면서 일종의 방문 판매를 했고, 원대오거리 부근에 있는 정구지(‘부추’의 경상도 사투리)밭을 택지로 개발 허가를 받아서 집 짓는 것 감독하기 등등, 여자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을 감내하셨고 저녁에는 일수도 하셨다. 일수는 사금융의 일종으로 돈을 빌려주고 100일 동안 매일 원금의 1/100과 약정된 이자를 더한 금액을 받는 것인데, 수익률은 높았지만 매일 돈을 받으러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고 또 떼일 위험도 많았기에 툭하면 누가 돈을 떼먹고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힘들어 하시곤 했다. 마침 어머니는 그날의 마지막 일정으로 일수대금 수금을 끝내고 와서 나를 부르신 것이었다. 부엌에서 어머니는 그 시간에 누구에게 갖다 주시려는지 식은 밥을 뜨거운 물에 말아서 양푼이에 담고 김치와 두, 세 가지 반찬을 챙기셨다. 지금이야 뜨거운 물은 항상 있는 것이지만 그때는 연탄불에 올려서 물을 끓여야 했으니 시간이 제법 걸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따라오너라.”

 그때 우리 집은 대구 원대오거리 부근의 우리 소유의 정구지 밭에 대지 50평에 건평 30평 규모의 서민주택을 계속해서 짓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가정을 거의 돌보시지 않으셨기에 어머니께서 5명인 자식들 학비까지 감당하면서 집안을 이끌어 가시다 보니 여윳돈이 거의 없어서 매번 집을 한두 채 만들어 팔고, 집이 팔리면 또 다시 한두 채를 만들어 팔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 정구지 밭이 우리 소유라서 집 지을 땅은 확보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중 지은 집 한 채에 우리 가족이 살았는데 집을 사겠다는 분들은 주인이 사는 집을 제일 튼튼하게 지었을 거라고 생각해서인지, 꼭 주인이 살고 있는 집을 사고자 했다. 때문에 어떤 때는 한해에도 두세번씩 신축한 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때는 겨울이 되면 요즘에 비해서 무척 추운 날이 많았는데 방한복이라고는 오리털 파카 같은 것은 없고 나일론 천속에 얇은 스펀지를 넣은 게 일반적인 제품이었다. 난방도 요즘 같지 않게 아랫목만 따뜻한 집이라서 겨울이면 형제들이 하나같이 아랫목에 발을 넣고는 지냈고 또 옷도 그러하니 지구온난화의 영향만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때는 지금보다 겨울이 훨씬 춥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스펀지 방한복으로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견디며 어머니를 따라나서는데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가 새로 집짓는 데서 어떤 거지가 가마니를 덮고 자고 있더라. 추워서 덜덜 떨고 있는 소리가 지나가는데 들리기에 뜨거운 것이라도 조금 먹여야겠다. 저러다 영하의 추위에 얼어 죽으면 우짜노”

 나는 소반을 들고 추위에 벌벌 떨면서 전등을 들고 앞장서서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집은 신축하다가 겨울의 매서운 한파로 중도에 그만둔 상태라 문짝도 없고 벽도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니 한데의 추위가 바람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전달될 수밖에 없는 곳이 었다.


 우리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거지가 부스스 일어났다. 가마니 한 장을 깔고 또 한 장을 덮은 거지는 얼마나 추웠는지 이빨이 따다닥 하면서 부딪치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려왔고 머리는 산발을 한 채로 입고 있는 옷은 땟물에 절어 있었다. 거지 중에서도 완전 상거지 행색이었다. 얼마나 더러운지 어머니가 함께 가지 않았다면 나는 무서워서 그런 거지 근처엔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거지는 소반을 받아 들자 뜨거운 물에 말은 상당히 많은 양의 밥과 반찬을 정신없이 먹었다. 나는 그 거지를 보면서 ‘세상을 이렇게 힘들 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가 저런 꼴을 면한 것도 다 어머니 덕분이라는 생각, 나아가 이런 거지에게도 온정을 베푸는 어머니의 자애로움에 대한 존경심 등 몇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는 밥을 먹고 있는 거지를 보면서 “우째 이렇게 어렵게 사노” 하시면서 혀를 차셨다. 한참 성장기 나이인 나에게 당시의 어머니가 보여주신 모습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당시에는 어머니가 불러서 그냥 추운 날씨에 이끌려 나갔고 불쌍한 거지가 밥 먹는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어머니께서는 항상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셨다.


 그로부터 2년 남짓 지난 후,

 어머니는 생활전선에서 죽기 살기로 뛰어다니시면서 옷가지와 화장품을 팔아도 생활비와 자식들 교육비 마련이 어렵자 서문시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빚을 내서 직업소개소를 차리기로 결정하셨다. 직업소개소에는 고물 진공관 라디오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진공관 라디오는 내가 고물상에서 고장 난 제품을 싸게 구입해서 집에서 수리해서 설치했던 때문인지 툭하면 부품의 여기저기서 고장이 나곤 했다. 고장이 나면 주말이나 방과 후에 내가 직접 수리하러 갔는데, 직업소개소가 다방 아가씨를 소개해 주고 수수료를 받는 것이 주 수입원이라서 매번 갈 때마다 일자리를 구하려는 아가씨들이 좁은 방에 가득했다. 그 아가씨들은 일자리가 생길 때까지 담배도 피우고 소주도 한잔하면서 화투놀이로 무료함을 달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나는 그들을 대할 때면 야릇한 향수와 어우러진 여자 살 냄새에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들고 라디오에만 매달려 고쳐주고 나오곤 했다.


 그런데 가게를 오픈하고 이삼일 후 동네 양아치 패거리들이 가게를 찾아와서는 어머니를 겁주면서 돈을 뜯어 가려고 하는 일이 발생했다. 완력으로 밀어붙이는 양아치들이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어머니는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지맨교?”

 갑자기 양아치 무리 중에 나잇살이나 제법 먹은 왕초 급이 어머니를 아는 체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누군지 몰라서 멀뚱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그 사람이 말 하더란다.

 “아지매! 제가 재작년 추운 겨울에 원대동 아지매 집에서 밤에 밥 얻어먹었던 놈입니다.”

 그러고는 함께 온 동료들에게 말했다.

 “야들아! 그냥 가자. 이 아지매는 내가 존경하는 분인데, 여기서 깽판 치면 안 된다.”

 그러면서 무리를 이끌고 나갔다고 한다. 양아치 무리들의 위협에 단단히 혼이 난 어머니는 구세주라도 만난 양, 고마움에 주머니에 있는 몇 천 원을 억지로라도 주려니까 한사코 마다했다.

 “아지매! 이러지 마소! 저를 인간 취급 해준 분이 바로 아지맵니더.”


 그날 저녁에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 내게 말 했다.

 “세상에 남에게 베풀어서 손해 보는 일 없다는 말이 사실이더라.”

 그러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날 이후 어머니 가게에는 그런 친구들이 근처에도 얼씬대지 않았다고 하니 어머니의 따뜻함이 보답으로 돌아온 예라 할 것이다.


 따뜻한 밥 한 끼가 다른 보답으로 돌아왔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는 측은지심, 이런 것이 어머니께서 몸소 보여주신 자식 교육이었다는 것, 그 교육이 오늘날 나의 자양분이 되었다는 사실이 더 소중한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고 특히나 추운 겨울날 거지를 도와주었던 그 일로 인하여 어머니가 도움을 받았던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아프리카 케냐와 인도네시아 시나붕 화산마을까지 사랑을 실천하는 마음을 배웠던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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