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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칼럼



내사랑이 시작되던날
18-02-28 16:38 210회 0건

“폭설로 입산이 전면 금지되었습니다.”
동계 설악산 등반을 하려고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 주변의 여관에 모여서 부족한 부식을 구입하고 배낭을 꾸린 후 하룻밤을 보내고 이른 새벽에 설악산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가까스로 백담사 초입의 용대리에 어렵게 도착한 우리 팀(남자대원 5명, 여자대원 3명)들에게 입구를 지키던 경찰관들은 딱 한마디로 산행불가를 통보했다.

1978년 1월의 강원도에는 눈이 엄청나게 내렸다.
특히 설악산 일원에는 무려 150cm나 되는 눈이 내렸는데 그 기록이 2014년 겨울에 깨졌다는 뉴스를 봤으니까 그 시절에도 보기 쉽지 않은 폭설이었다.
거기다가 내린 눈의 대부분이 우리가 마장동에서 장비를 꾸리던 어제 밤과 오늘 새벽사이에 내렸었다.
 1970년대만 해도 겨울 장기등반을 하려면 장비를 준비하는 데에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었다.
며칠 동안 설악산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해야 했기에 동계용인 윔퍼 텐트는 산악회 공용 장비를 사용한다 치더라도 동계용 비브람 등산화, 아이젠, 키슬링 배낭(장기등반 용 초대형 배낭)을 준비해야하는 등 장비를 준비하는데도 대학교 한 학기 등록금의 반 정도는 들었기에 여기저기 돈을 꾼 돈으로 간신히 장비를 준비해서 온 설악산 입구에서 우리는 문전박대를 당했던 것이다.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그날 우리는 경찰관 아저씨에게 
‘대학산악부이라서 안전은 우리가 더 잘 챙긴다. 여기보다 수십 배나 더 위험한 히말라야에 가는 것도 안 막는데 설악산은 왜 못 들어가게 하나?’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7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그냥은 절대로 못 돌아간다.’
(폭설로 길이 막혔는데도 우리들은 가는데 까지 가보자며 길이 뚫려있는 마장동에서 홍천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가는 표를 끊었고 홍천까지 오는 도중에 라디오 뉴스에서 군인들을 동원해서 인제, 원통, 용대리까지 순차적으로 길을 뚫었다기에 홍천에서 인제까지.... 다시 원통까지... 마지막으로 용대리까지 이렇게 티켓팅을 네 번이나 하면서 도착했기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내가 두 달 전에 제대를 했기에 젊은 후배들을 안전하게 잘 챙길 수 있다.’
심지어는 
‘못 들어가게 하면 우리가 산행 준비하느라고 들어간 돈을 돌려 달라.’ 
등등 말도 안 되는 온갖 생떼를 무려 2시간 넘게 부려서 간신히 출입허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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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슬링 배낭>


(불과 며칠 전인 78년 1월 7일 설악산 칠성봉 계곡에서 눈사태로 한양대 학생을 포함해서 4명이 숨졌고 2년 전인 76년 2월에는 공룡능선에서 1977에베레스트 동계등반훈련을 하던 최 수남 대장을 포함한 4명이 역시 눈사태로 사망했기에 입산 통제가 더욱 심해져 있었다.)
이와 같은 생떼가 우리들을 큰 위험에 빠져들게 될 줄은 그때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하고 입산 허가를 받은 것만도 좋아서 희희낙락하며 용대리 입구에서 백담사 산장까지 발자국 하나 없이 켜켜이 쌓인 눈을 러셀(눈을 다지면서 길 내기) 하면서 걷다보니 어둠이 계곡을 뒤덮은 저녁 6시가 되어서야 백담 산장에 도착했다.
영하 20도 가까운 겨울 산에서 난방시설도 없는 산장에서의 밤을 보내면서 그 시린 발을 어떻게 감당했는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발부터 시려온다.
첫날의 목적지가 수렴동 대피소였는데 이런저런 문제로 백담 산장에서 지냈기에 둘째 날은 새벽 4시부터 일어나서 바쁘게 서둘렀다.
그런데도 워낙 많이 쌓인 눈으로 인하여 돌아가면서 러셀을 하면서 길을 뚫느라 12시가 넘어서야 수렴동 대피소에 도달했다.
행동식으로 싸늘하게 식은 식빵을 끓인 분유 물에 적셔서 가벼운 점심식사를 한 후 오늘 봉정암까지는 어떻게든지 가자면서 등반대장에게 준비 되는대로 앞장서서 끌면 내가 뒤처리를 하면서 따라 가겠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아이젠 매는 줄을 매고 푸는 것이 지금과 같이 편리하게 되어 있질 않아서 여성대원들의 경우에는 남자대원들이 도와주어야했기에 후미에서 등반팀 동료들을 도왔던 나는 항상 출발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리고서 대피소 문을 나서는 순간....

아뿔사!
새벽부터 지속적인 러셀로 지친 등반대장은 대피소 좌측으로 난 등산로로 가지 않고 세찬바람에 눈이 날아가서 투명하게 얼음판이 들어난 대피소 앞 옥녀탕 계곡의 얼음 위를 통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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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동료들을 도와준 후 마지막으로 아이젠 줄을 묶고 산장을 출발했을 때는 우리 여덟 명 중 네 명은 벌써 작은 얼음 절벽을 넘어서 올라가 있었고 다섯 번째 여성대원이 얼음 턱을 올라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참고로 수렴동 대피소 앞의 계곡은 지금은 오래전에 폭우 때 상류에서 굴러 내려온 돌들로 많이 얕아 졌지만 그 시절만 해도 여름산행 때는 바위위에서 다이빙을 할 수 있었을 정도의 4~5미터 깊이였다. 또한 그 시절에는 설악산에서 취사, 야영, 그리고 계곡에서의 수영이 불법이 아니었음을 독자들은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그런데 다섯 번째로 얼음 턱을 올라가는 여성대원의 배낭이 워낙 무거워서 혼자서 얼음 턱을 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았다.
뒤 따라가던 후배 남자대원(지금은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 이민 가서 잘 살고 있다)이 가까이 가서 얼음 절벽을 올라가는 것을 도와주는 순간!
“와장창!”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체중과 배낭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얼음판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물에 빠진 두 사람은 간신히 얼음 난간을 잡고 버티는 상황이었고 계곡의 세찬 골바람과 영하 15~6도를 오르내리는 물속에서 머리만 물밖에 내놓고 있었다.
이미 얼음 난간을 올라간 네 명은 물에 빠진 두 명을 도와줄 방법이 없었기에 얼음판 위에 남아있던 후배와 나에게 그 역할이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자일을 던져서 물에 빠진 두 명이 얼음판 밑으로 떠내려가지 않게 묶은 후 나와 같이 있던 후배를 자일로 묶고 얼음판을 기어가게해서 두 명이 맨 배낭을 벗겨서 얼음판 위로 올렸다.
물에 빠지고 나서 그 때까지 시간이 20분 가까이 흘렀기에 얼음 물속에 있는 두 명 중 남자대원은 저체온증에 빠져들면서 얼굴이 시퍼렇게 변하고 있었다.
남녀가 물에 빠졌기에 당연히 여성대원을 먼저 건져 올리려고 했으나 남자대원의 얼굴색의 변화를 보고는 순서를 바꿔서 남자대원부터 먼저 끌어 올렸고 뒤이어 여성대원을 구출했다( 여자가 얼음물속에서 체지방으로 훨씬 더 잘 견딘다는 것을 이날 이후로 확실히 알았다. 같이 물에 빠진 남자는 저체온으로 얼굴색이 시퍼렇게 변하고 있었는데 여자는 아직도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홍조를 띄고 있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대피소에서 점심식사 후 출발한 직 후에 사고가 났기에 대피소로 후퇴를 해서 옷을 갈아입히고 굳은 몸도 문질러주면서 대피소에 준비되어있는 화목으로 군불을 때는 바람에 저체온에 빠진 후배도 빨리 회복이 되었다.
우리들만이 있었던 대피소에서의 그날 밤!
다시 살아서 돌아와 준 후배들로 인하여 얼마나 행복한 밤이었는지....
늦게까지 웃고 떠드는 바람에 늦게까지 대피소는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다음날! 
이틀 동안의 산행 일정에 차질이 생긴 우리들은 꼭두새벽부터 서둘렀다.
오늘의 목표는 대청봉 부근의 군용 폐 막사(그 시절만 해도 시멘트 구조물만 남아있었던 때였는데 그 후 80년대에는 이 폐 막사를 보수해서 대청산장으로 잠시 사용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아직 중청이나 소청에는 산장이 없었다)까지였기에 우리는 어떻게든 대청봉까지 올라가야했다.
폭설이후로 아무도 지나간 흔적이 없는 계곡의 깊은 눈으로 가슴까지 차오르는 눈을 러셀하면서 힘이 부치는 대원들의 배낭속의 짐을 나눠지기도 하면서 독려 끝에 안개 속에 희미한 달빛이 비치는 밤 8시쯤 간신히 대청봉의 폐 막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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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청봉의 군용 폐 막사>

체력적으로 거의 탈진한 대원들은 저녁 먹을 생각도 않고 바람에 날려 온 눈이 막사 안에 수북이 쌓였지만 판초 우의 위의 침낭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깊은 잠에 들었다.
혹한의 겨울에 거의 14시간동안 러셀을 하면서 길을 뚫었던 등반대장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눈 속을 허리까지 푹푹 빠지면서 함께 걸었던 대원들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나도 힘이 들길 마찬가지였지만 후배들의 정신적 버팀목인 선배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그것은 식사준비를 해서 잠이 든 동료들을 먹인 후 재워야했다.
먹이지 않으면 체력적으로 탈진한 동료들이 영하20도의 혹한 속의 폐 막사 안에서 밤사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파김치가 된 몸으로 배낭에서 쌀과 꽁치 통조림을 꺼내서 식사준비를 하는데....
잠을 자지 않고 나를 도와주는 여자후배가 있었다.
도와주는 여자후배와 같이 밥을 하고 찌개를 끓인 후 골아 떨어진 후배들을 억지로 깨워서 반강제로 먹였다.
1978년 1월 대청봉에서의 밤은 폐 막사 밖을 지나가는 거센 바람소리와 함께  식사준비와 설거지를 도와주던 여자후배의 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사랑의 향기를 느끼면서 그렇게 깊어만 갔다.
대청봉에서 나를 도와 식사준비를 함께했던 여자 후배는 수렴동 계곡에서 있었던 사고현장에서 군대갔다온 복학생 선배가 물에 빠진 동료를 구출해내는 모습을 절벽 위 얼음 턱 위에서 가슴조리며 지켜봤고 그 힘든 대청봉까지의 오름길에서도 지친 후배들을 독려하느라 노래를 부르며 후미를 지키던 선배의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고 한다.
그 때 그 여자후배가 바로 지금 나와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내 아내이다.
그리고 그때 즐겨 부르던 그 노래(마누라 Song)를 여기에 올린다.
나와 가깝게 지낸 분들은 내가 이 노래를 종종 부르는 것을 보셨겠지만.....

* 마누라 Song (축배의 노래 곡으로)

마누라~~ 마누라 마누라 때리지 마~~
불쌍한 이 남편을
마누라~~ 마누라 마누라 때리지 마~~
불쌍한 이 남편을
마누라가 집어던진 재떨이에
연약한 내 머리 빵구났네.
마누라~~ 마누라 마누라 때리지 마~~
불쌍한 이 남편을
마누라가 한번만 봐준다면
다시는 영자 씨를 만나지 않겠소
마누라~~ 마누라 마누라 때리지 마~~ 
불쌍한 이 남편을
마누라와 함께 걷던 그 바닷가
마누라와 함께 걷던 그 설악산
마누라~~ 마누라 마누라 때리지 마~~
옛정을 생각해서...  

(아내는 영하 20도 아래의 혹한의 백담 산장에서 추운 밤을 보낸 것을 두고 “우리가 이렇게 한 이불 덮고 살게 되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 추운 날 꼭 끌어안고 잤을텐데....” 라는 후회 아닌 후회를 하곤 해서 종종 나를 웃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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