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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칼럼



《사랑은 행동이다》사랑과 긍정의 마음은 죽음도 이겨내는 힘
19-01-14 14:29 1,471회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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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사랑의 힘

사랑과 긍정의 마음은 죽음도 이겨내는 힘



 

 대학을 졸업한 후 3년 반 동안 다니고 있던 직장(방위산업체 연구소)에서 나와서 1984년 ‘여의마이컴’(여의시스템의 전신)을 차렸다.

 자동제어 제품 개발을 목표로 잡고 창업했지만 가진 돈이 퇴직금 외에는 거의 없었기에 8비트 애플 컴퓨터 복제품을 조립해 팔아서 장사로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이익이 생기면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했다.

 창업 후 처음 3~4개월은 간신히 손익분기점을 맞추면서 그럭저럭 넘어가고 있었는데 4개월 후인 11월부터는 마침 불어 닥친 퍼스널 컴퓨터 붐을 타고, 애플컴퓨터 복제품은 무섭게 팔려나가곤 했다. 만들기도 전에 현금주문을 해놓고 기다리는 고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10개월 정도를 바쁘게 보냈다. 그 때는 하루 평균 12시간이상 가게 문을 열어두어야 했다. 시흥에 있는 아파트에서 여의도 매장을 아기를 둘러매고 버스로 왕복하는 데 평균 3시간이나 걸렸다. 그러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준비하고 출근해서 근무하다 저녁에 집에 가서 샤워하고 두 살 꼬맹이를 재우고 잠자리에 들면 하루 평균 6시간도 못자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거기다가 명절이나 크리스마스 때도 세뱃돈으로 컴퓨터를 사러 오거나 기능 확장카드 또는 게임 디스켓을 사러 오는 꼬마 손님 때문에 단 하루도 휴무일 없이 일을 해야만 했다.


 너무 바빠서 밥도 제때에 못 먹는 게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그렇게 정신없이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던 그때에 두 돌 반 정도의 어린 아기였던 석현(큰아들)이가 백혈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았다.

 그때만 해도 백혈병은 불치의 혈액암이라서 영화 <애수의 크리스마스>, <러브 스토리>와 같이 영화의 단골 질병으로 쓰일 때였다. 나는 그때 아직 만 30도 안되었고 57년생인 아내는 만 27살의 나이였다. 석현이는 백혈병으로 인한 합병증인 폐렴으로 중환자실까지 가면서 죽음과 전쟁을 벌였다. 아직도 20대 나이의 부부였고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던 우리 부부는 그 고통을 감당하기가 너무도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때 아내는 둘째를 임신해서 6개월이 되었는데, 20대의 엄마로서는 충격을 감당하기 힘들었던지 유산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석현이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했기에, 아내와 상의해서 다시 아기를 가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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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현이의 백혈병 치료 전의 아기시절에



 그 시절 백혈병은 재발률이 워낙 높았다. 재발하면 골수이식이 아니면 방법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골수이식을 하자면 아이에게 맞는 골수를 찾아야 했는데 적합한 골수는 타인에게서는 10만 명에 한 명을 찾을까 말까한 확률이라고 했다. 그런데 형제간에는 골수가 맞을 확률이 50%라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병원 측으로부터 듣고서 우리 부부는 무조건 아이를 가지기로 했던 것이다.

 창업한지 1년도 안된 회사는 주인이 없는 상태로 방치되었고, 치료비는 상상을 못할 정도(중환자실에서 인터페론 투약을 할 전후로는 한 주에 270만원이 소요된 적도 있었다. 그 시절 대기업 대졸 초임이 25만원 수준 이었다.)로 들어갔다. 주인 없이 직원 두 명이 지키던 회사는 적자가 누적되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둘째가 태어난 날, 의사는 건강검진 결과 아내가 폐결핵이니 백혈병 치료를 받는 아들 및 신생아는 면역력이 떨어지니까 폐결핵 환자와 무조건 격리시키라고 통보했다. 석현이는 항암제 치료로 인하여 식욕이 떨어져서 밥 한 끼 먹이는데 보통 2시간이 걸렸다. 백혈병 치료를 받는 애를 어디에 맡길 수도 없었다. 엄마가 아니면 어린 아이 병간호는 거의 불가능했기에 우리는 가족의 죽고 사는 문제를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백혈병 걸린 아들과 폐결핵 걸린 아내가 같이 생활하면서 동시에 치료를 받기로 했다. 아내의 폐결핵 약인 스트렙토마이신은 내가 직접 주사기로 주사를 놓으면서 치료를 해 나갔다.(그 시절에는 약을 약국에서 마음대로 구입할 수 있었다.)

 빚을 일부라도 갚기 위해서 그동안 어렵게 장만한 아파트를 팔아서 치료비에 보태고 시흥에 있는 조그만 아파트로 전세를 얻어 이사를 갔다.

 이사 가던 그날의 참담한 심정은 다시는 되새김질 하고 싶지 않은 괴로움이었고 아내는 이삿짐을 챙기면서 많이 울었다.

 

 돌이켜 생각해도 끔찍한 시간이었던 그때에 우리 가족에겐 또 다른 날벼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 다음해에 집안의 가장이었던 내가 위암 진단을 받고 수술대에 몸을 뉘인 것이다. 83년 창업에, 84년 첫째의 백혈병과 둘째의 유산, 85년에 다시 임신한 둘째 출산과 아내의 폐결핵, 그리고 86년에 내가 위암수술을 받았으니 그때 우리는 온가족은 죽음의 그림자를 매일 매일 느끼며 경제적으로도 완전히 거덜이 나고 있었다.

 내가 위암 수술 받았을 때 백혈병 투병중인 큰애(석현이)는 4년 4개월이었고 둘째는 태어난 지 11개월의 아기였다. 이제 고작 31년을 산 나와 28살인 아내에게 그렇게 한꺼번에 죽음의 그림자가 몰려왔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나는 죽음과의 전쟁에서 이겨내기 위한 용기를 북돋우기 시작했다.

 내가 이대로 죽으면 누가 우리 아들 병 치료할 돈을 벌까?

 누가 아내를 옆에서 위로해주고 지켜 줄까?

 누가 아직 돌도 안된 둘째를 사랑해줄까?

 평생을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신 어머니는 누가 돌보나? 싶었다.

 

 나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은 그렇게 없었지만 온가족이 질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서 사랑하는 자식과 아내를 돌봐야 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자식의 병 치료는 해주고 공부도 어느 정도는 시켜주어야 했다.

 아내와 나는 죽음의 그림자가 일렁이던 그 시절에 서로를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면서 그 어려운 시간을 이겨냈다.

 

 그 시절에 나에겐 사랑하는 아내와 내가 돌봐야 할 투병중인 자식이 있었고 일제 강점기에 여자 정신대로 끌려갈 뻔했던 어머니가 계셨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맏딸이었던 어머니를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게 하려고 급하게 신랑감을 구해서 결혼(결혼한 여자는 정신대에 뽑지 않았다.)시켰는데 결과적으로 어머니(외할아버지가 깨신 분이라서 어머니도 상당 수준까지 신식 교육을 받으셨다.)는 전혀 격에 맞지 않는 무학자인데다가 요즈음 표현으로 분노조절장애자에 도박 중독증상까지 있는 아버지와 결혼함으로 인해 평생 고통 속에서 삶을 보내셨다.

 어머니는 결혼하시고서 아버지가 중일전쟁과 6·25전쟁에 참전하셨다가 전쟁 중 춘천전투에서 부상으로 52년 의병 전역할 때까지 대부분 혼자 사셨기에 결혼 후 10년이 넘어서 태어난 우리 집의 장남인 나에게 미래의 희망을 몽땅 거셨다. 하루저녁에 도박판에서 집문서를 날리고 오시기도 하는 아버지로 인하여 돈으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어떻게든 나를 대학에 다닐 수 있도록 하려고 한 어머니의 온 정성과 희생으로 키워진 내가 어머니를 두고 먼저 죽을 수는 없었다.

 

 작년 2017년 11월 말은 내가 위암수술 받기 전에 살았던 삶의 시간과 수술 받은 후에 살았던 시간의 길이가 역전되는 시점이었다. 위를 반 이상이나 잘라내는 수술을 받은 후 극심한 소화 불량으로 인하여 이러다가 길어야 몇 년 내로 생을 하직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었다. 그러던 내가 지금까지 살아서 자식들 대학 졸업도 보고, 장가도 보내고, 손주의 재롱까지 볼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했다.

 당시 나의 소망은 큰애의 백혈병이 완치되고 둘째까지 대학에 입학하는 모습만 보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지난 연말에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나는 염라대왕이 그만하면 살만큼 충분히 살았으니 이제 밥 숟가락 놓고 저 세상으로 오라고 하더라도, 더 이상 아내와 행복을 함께 나누지 못하고 떠나는 아쉬움이야 남아있겠지만 지금까지 이 만큼이라도 내 생명을 지켜줌에 감사하면서 떠날 수 있겠다.”라고…

 지나온 고통의 시간은 많았지만 우리 부부는 합심해서 온가족에 닥친 죽음의 공포를 이겨냈고 빚더미에 올라서 회사까지도 파산할 것 같은 어려움도 잘 이겨냈기에 더 이상 큰 욕심이 없다.

 

 어느새 나도 지하철 경로석에 빈자리가 생기면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앉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고, 대한민국의 기술혁신 강소기업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협회장을 두 번씩이나 했으니 뭐가 더 아쉬운 게 있나 싶다.

 거기에다가 창업했던 여의시스템도 우리 가족의 죽음과의 투병과 IMF구제금융, 카드대란, 미국 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으로 인한 금융 위기 등 온갖 어려움을 겪고서도 여전히 성장하고 있으니 더할 나위가 없다.

 

 둘째 아들 내외는 결혼하고 나서 우리 부부가 사는 집에서 나가지 않고 같이 산다. 요즈음 유행어로 ‘신 캥거루 족’으로 분류되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 자립할 능력이나 생각이 없이 부모에게 얹혀서 사는 자녀를 ‘캥거루 족’이라 하고 경제적으로도 충분한 자립능력이 있고 직장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육아를 부모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함께 하고 주거비는 슬쩍 부모에게 의지하여 무상으로 처리하고, 자신들이 번 돈은 꼬박꼬박 저축하는 자녀를 ‘신 캥거루 족’이라고 한다는 것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둘째 아들 부부는 완벽한 ‘신 캥거루 족’이다.

 며느리는 얼마 전에 창업해서 사무실에서 사업기획을 짜고 판교에 있는 스타트업 교육기관에서 공부하느라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요즈음 들어서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내가 이 일을 꼭 하고 싶다고 할 수 있게 되고, 하고 싶지 않다고 안하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학창시절 대학 산악부에서 눈이 맞아서 결혼을 한 우리 부부는 지금도 역마살이 철철 넘쳐서 자식 짝 맞춰주고 분가시킨 후에는 환갑이 지나면 국내외 배낭여행을 하면서 멋있게 그리고 신나게 살기로 계획 했는데… 그리고 손자 손녀 돌보미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결과부터 이야기하면 환갑도 한참 지나서 지공거사(지하철 공짜로 타는 나이의 노인)되는 날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이 나이에도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협회장이라는 봉사의 자리에다가, 손녀 재롱을 실컷 보면서 손녀 바보가 되는 복까지 듬뿍 받았으니, 우리 부부가 꿈꾸었던 지난 계획은 조금 더 미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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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턱주가리 아파라



 우리 부부는 몇 년 전에 아코디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학창시절 도봉산이나 북한산에서 야영을 할 때면 배낭에 들어갈 정도의 컴팩트 사이즈의 아코디언을 가져 와서 산노래를 신나게 연주하던 산악부 후배(현 연세대 한 탁돈 교수)의 멋진 모습에 매료되어 나도 산에 가면 그렇게 아코디언 연주를 해야지 하는 의욕만 앞섰지 몸은 따라주질 않았다.

 결국 나는 며칠 만에 아코디언 배우기를 포기하고 수강료만 강습소에 보태주었는데, 나의 어눌한 손동작으로는 오른 손은 건반을 잡고 왼손은 코드를 잡아야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양팔로 아코디언 주름을 접었다 폈다하는 세 가지 동작을 동시에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랜 시간 엄청난 노력이 따라주면 가능 하기는 하겠지만 그러기에는 내 나이도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의 노래 속의 부부와 동년배의 나이가 되었고 아코디언을 배우는 것 외에도 내가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많은데 괜히 스트레스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아코디언 배우기를 시작한 것이 전혀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내는 아코디언의 매력에 푹 빠져서 집에 와서도 틈만 나면 아코디언을 끌어안고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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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정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아내

 

 내가 기업경영과 협회장 일로 밖을 나도는 시간이 많아서 아내를 자주 안아주지도 못하기에 아코디언을 서방 대용품으로 삼는구나 싶기도 하지만 그나마 아코디언을 대용품으로 삼으니 다행이지 외간남자를 대용품으로 삼았으면 나는 완전 젖은 낙엽신세가 되어서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었을 텐데…

 아내는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인터넷에 연주 동영상도 많이 올렸고 아마추어 아코디언 연주자로 노인정이나 제법 큰 행사에 봉사활동도 열심히 다닐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등산은 학창시절부터 아내도 즐겨 했기에 부부가 같이 다니지만 암벽등반은 나 혼자 산악부 후배들과 같이 즐기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 팔 힘도 많이 약해지다 보니 이제는 난이도가 높은 데는 피하고 운동겸해서 가볍게 등반할 수 있는 코스를 택해서 하고 있다(몇 년 전에 설악산 비선대 바로 앞의 적벽에 체력도 안되면서 의욕만 가지고 오르다가 힘들어서 아주 그냥 골로 가는가 싶었다.).

 말이 나왔으니까 한마디 더하자면 나는 아직도 기업도 열심히 경영하고 아내와 같이 등산도 하고 틈틈이 암벽등반도 즐기고 아내는 열심히 봉사활동도 하는데 우리 부부같이 건강한 60대는 ‘지공거사’ 반열에서 제외시켜 주는 게 지하철 적자도 줄이는 방편이 아닐까도 싶다.

 얼마 후면 지하철 공짜로 태워주는 나이가 된다니까 왠지 갑자기 팍 늙어버리는 것 같고 아직도 지나가는 멋진 글래머 여인을 보면 나도 몰래 마음속으로나마 품어볼 정도로 철이 못 든 인간인데 지공거사가되면 그런 여인들이 남자로 쳐주지도 않을 것 같아서 괜히 헛소리 한번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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