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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행동이다》프롤로그 서문을 대신하여_창백한 푸른 점(2/2)
18-11-26 09:49 1,775회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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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 서문을 대신하여

창백한 푸른 점


 

 지금 우리는 종교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큰 교세를 가진 종교단체에서 집계한 총 신도 수는 전 세계인구보다 훨씬 더 많다고 하니 집계되지 않은 소수종교까지 포함하면 종교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히 틀린 표현은 아닐 것 같다. 그렇다면 종교를 가지신 분들은 종교의 참 진리가 무엇인지 한 번은 더 생각해 봐야할 일이다.


 얼마 전 어떤 독서토론 모임에서 주제로 정했던 책이 우주와 과학에 대하여 아름다운 도해까지 곁들여서 알게 쉽게 쓰인 리처드 도킨스의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이었다.

 이 책은 블랙홀, 무지개 분광기술로 수십 억 년 너머에 있는 별의 존재와 별의 성분을 알아내는 것과 자연에서 발견된 다양한 화석으로 진화론이 증명되어 가는 과정 등을 설명하고 있었다. 내가 우주와 과학의 신비로움에서 기업의 혁신적 성장 동력을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이 책을 선정했고 나의 의도대로 책을 읽고 독서토론회에 참석한 분들의 다양한 의견이 나왔는데…


 갑자기 토론회에 참석한 한 분이 반론을 제기하셨다. 그 분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는데 창조가 아니고 진화라고요? 미생물에서 바다의 생명체가 되고 물고기가 진화해서 육지생물이 되고 육지 생물 중에 인간이 만들어졌다고요?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반론으로 독서토론회는 상당히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다. 과학 서적으로 독서토론회를 하던 도중에 갑자기 창조론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의를 듣는 시간이 되었고…


 여기서 나는 과학과 종교라는 양립할 수 있는 개념을 이야기하면서 과학을 통한 사랑의 개념을 논하고자한다.

 인간은 자연현상(예를 들면 오로라, 개기일식, 혜성, 무지개, 공룡화석)을 보고 왜 이런 현상이 생기나 하는 의문을 가진다. 과학자는 상상력을 통해 이를 유추하는 가설(상상)을 제기한다. 이 가설은 세월이 지나면서 다른 과학자에 의하여 증명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증명과정

에서 엉터리로 판명되면서 폐기되고 새로운 가설이 나오기도 한다. 즉 공룡이 왜 멸종했는가? 아프리카 서부와 아메리카 동부의 해안선이 왜 들어맞는가? 혜성은 왜 이상한 궤적과 꼬리를 끌고 가나?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맞는가?

 이런 수많은 의문들을 과학자들은 제기하고, 그 답을 찾으면서 가설을 세운다. 이런 과정에서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과 같은 가설이 나오고, 이 가설은 증명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신뢰할 수 있는 이론, 즉 정설이 되고 마침내 교과서에도 실리게 된다.


 이에 반하여 종교는 바로 그 종교를 신봉하는 분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면서 믿는 믿음 그 자체이다. 타 종교를 믿는 분에게는 이를 증명할 어떤 수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힌두교의 모든 물성(코끼리, 사자, 원숭이, 바위, 태양, 달 등)에는 신이 존재한다는 교리나, 조로아스터교에서 불의 신 그리고 크리스천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과 같은 존재를 어떻게 다른 종교를 믿는 분에게 증명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믿는 종교 속의 신만이 진짜임을, 혹은 타인의 종교의 신이 가짜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아주 드물게 성공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실패로 끝나고 잘못하다가는 따귀라도 얻어맞기 십상이다.

 한 종교 내에서는 불합리한 일이 벌어져도 같은 종교를 믿기에 용인될 수 있는 일들도 있다. 가령 중세시대 지동설을 주장한 선각적 과학자인 조르다노 브루노를 이단으로 판정하거나 수 만 명의 멀쩡한 여성을 마녀라는 낙인을 찍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화형시킨 행위가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용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종교는 틀리고 과학은 옳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종교와 과학은 그 출발점부터 다르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가설과 반복적인 증명’이 과학이고 종교는 ‘믿음’인 것이다.


 여기서 말을 바꾸어 어머니 이야기를 한 번 더 하겠다.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교육을 받았던 분으로 팔십이 다되신 나이에도 일본여행을 가셔서 일본어로 대화가 가능했던 분이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외출할 때 쓰고 나가시던 갓을 보관하는 보관함에 태극기를 그려놓고 어린 자식들(나에겐 어머니, 외삼촌, 이모)에게 ‘저게 우리 나라 태극기’라고 교육을 시키신 분이다. 딸도 교육을 받아야한다는 생각을 가지신 열린 마음을 가진 분이라서 어머니도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으셨다(외할아버지의 갓 보관함의 태극기는 내가 초등학교 다닐때도 그대로 있어서 막내 이모님이 갓에 그려진 태극기를 가리키며 외할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어머니는 한자와 한글이 혼용된 신문도 읽으셨던 분인데 내가 신문의 한자를 잘못 읽는 것을 보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저녁에 한자를 나에게 가르쳤다. 돌아가시기 2~3년 전에도 스티븐 호킹 박사의 우주와 블랙홀에 대한 이야기를 자식들과 나눌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셨던 분이다. 또한 독실한 불교신자였지만 신문과 책을 통해서 많은 정보를 얻은 덕분인지 종교에 대해서 조금 특별한 가치관을 가지셨다. 그 특별한 종교관이란 “종교는 착하게 살기 위한 방편으로 믿어야지 그 교리나 책에 쓰인 내용 그대로를 절대적으로 믿는 것은 옳은 종교인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 힌두교, 불교 외에도 무수히 많은 소 수 종교들이 있다. 하지만 어느 종교도 자신의 종교가 과학처럼 ‘진실’임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단지 믿는 사람이 그렇게 믿을 뿐이다.

 한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교리가 절대적인 진리라면 지금 세상은 그종교로 대부분 통합이 되었을 텐데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은 종교란 믿음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 스스로가 세상을 선하게 살고, 어렵게 사는 사람을 사랑의 마음으로 불쌍하게 생각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참 종교인이라고 나는 믿는다. 종교는 그렇게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기에 비록 어떤 종교의 신을 믿지 않더라도 종교의 가르침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평생을 부처님에게 의지하고 있고 일본이나 네팔, 부탄 같은 나라도 불교가 융성하고 있지만, 불교의 발생지 인도에서는 불교는 자취만 있을 뿐 힌두교도가 대부분이고,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유교 등등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종교가 각각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느 종교도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라고 생각하셨던 게 어머니의 종교관이다. 그러다보니 나도 어머니의 종교관에 젖어 들어서 특정 종교는 믿지 않아도 교회나 성당이나 절에 가서 행사에 참석(예를 들면 교회에서의 결혼식)하면 그냥 경건한 분위기에 젖어서 사이비 신자노릇도 잘한다.

 그러다보니 우리 형제들 중에서도 누님은 천주교, 남동생과 여동생은 불교, 막내와 나는 종교가 없고 집에 들어온 새 식구(며느리, 사위)와 자녀들도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빼고는 골고루 있다. 거기다가 아들 내외는 성당에 다니기에 결혼식을 동네에 있는 자그마한 천주교 성당에서 했다.

 나는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까지 중학교만 빼고 기독교와 천주교 재단의 학교를 나왔기에 성경 속의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참된 인간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나의 종교를 물으면 무교란 의미에서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한다. 내가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고 특정 종교에 편향된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기 바란다.

 왜냐하면 나는 교회와 성당, 절 그리고 인도의 힌두교 신전, 심지어는 인도 배낭여행에서 터번을 두른 시크교의 성전에 들러서도 종교의 참 진리인 사랑을 알기에 머리 숙여 경배하고 경의를 표했다.


 종교는 자신의 영혼을 평온하게 하는, 스스로 착하게 사는, 그리고 남을 나만큼 소중하게 생각하는 방편으로 생각해야 한다. 종교가 지고지순한 최대의 절대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세상에는 싸움이 끊이질 않는다. 세상을 죽음의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것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경우가 많다. 죽음을 부르는 종교는 나 외에 다른 신은 모두 거짓이라는 유일신 개념으로 무장한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지금 이슬람의 특정 종파가 저지르는 테러로 인하여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서구의 많은 나라들에게서 비난을 받고 있다. 중세에는 있지도 않은 마녀사냥으로 수 만 명의 여인들을 불에 태워 처형을 한 것도 천주교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한 악행이었다. 십자군이라는 미명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임을 당했던가? 거기다가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던 병사들은 자신의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이 두려워 철로 된 정조대를 채우는 만행도 저질렀다. 드라큘라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루마니아의 공국의 지도자는 오스만 투르크 병사 수 천 명을 산채로 창에 꿰어 죽였다.

 세상 이치는 인과응보로 돌아간다. 사랑에는 사랑, 칼에는 칼로 맞서는 것이 세상 이치다. 현대에 와서 힘의 균형에서 밀리기 시작한 특정 이슬람교도들은 결국 마지막 선택으로 무자비한 테러를 택했다. 하나님과 부처님 그리고 알라가 말씀하신 ‘사랑’과 ‘자비’ 같은 절대 선은 어디가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죽어가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어머니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종교를 교리로 믿지 말고 그분들이 말씀하신 절대선인 사랑과 자비로 세상을 바라보아라. 사랑과 자비로 세상을 볼 눈을 가지고 있다면 그게 기독교, 천주교, 불교 이슬람을 믿거나 안 믿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종교란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만인이 공감할 방법은 없다. 문제는 객관적인 증명이 될 수 없는 종교적 내용으로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분들이 토론을 하면, 토론이 끝날 때까지 답은 없고 토론한 분들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정신적 불쾌감만 주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들끼리 친구들 모임에서 죽자고 토론하는 것처럼…


 나는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따뜻함으로 배려하면서 세상을 살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에서 이 책을 출간하기로 마음먹었다.

 천문과학자인 칼 세이건(Carl Sagan)은 나사(NASA)를 설득해 미국의 우주탐사선 보이저 2호가 해왕성 궤도 외곽을 지날 때 지구 쪽으로 카메라를 돌려 사진을 찍도록 했다. 전파를 타고 지상의 수신기에 전송된 이미지들은 완성된 사진으로 재구성되었다. 지구는 이 사진에

서 광활한 우주공간에서 눈에 보일 듯 말듯 한 작은 점으로 존재했다. 칼 세이건은 이 사진을 보고 ‘창백한 푸른 점(The Pale Blue Dot)’이란 시를 읊었다.



The Pale Blue Dot(창백한 푸른 점 지구)

 

여기가 우리의 보금자리이고 바로 우리입니다.

이곳에서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알고, 우리가 들어봤으며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람이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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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수놓은 은하수


우리의 기쁨과 고통

우리가 확신하는 수 천 개의 종교와 이념, 경제체제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들, 모든 영웅과 겁쟁이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모든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 촉망받는 아이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스승과 부패한 정치인들

모든 Superstar

모든 최고의 지도자들

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태양 빛 속에 떠다니는 저 작은 먼지위에서 살다 갔습니다.

지구는 코스모스(COSMOS, 우주)라는 거대한 극장의 아주 작은 무대입니다.

그 모든 장군과 황제들이 아주 잠시 동안

저 점의 작은 부분의 지배자가 되려 한 탓에

흘렀던 수많은 피의 강을 생각해보십시오.

저 점의 한 영역의 주민들이

거의 분간할 수도 없는 다른 영역의 주민들에게

끝없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자주 불화를 일으키고

얼마나 간절히 서로를 죽이고 싶어 하며

얼마나 강렬히 증오하는지

우리의 만용, 우리의 자만심

우리가 우주 속의 특별한 존재라는 착각에 대해

저 창백하게 빛나는 점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우리 행성은 사방을 뒤덮은 어두운 우주속의

외로운 하나의 알갱이입니다.


 칼 세이건은 이 시에서 광활한 우주에서 작은 먼지에 불과한 지구에 인간들이 같이 살면서 종교의 다름 혹은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이념의 차이로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고 했다.

사랑은 지고지순한 절대 선이다.

칼 세이건의 시에 공감하고 공감하지 않고는 독자들의 몫이다.

 

얼마 전에 우연한 자리에서 몇 명의 지인들과 막걸리 한잔 하면서 가벼운 토론을 하는 자리가 있었다. 툭하면 거친 말투로 비난하길 즐기는 한 술벗은 자신이 가진 편향된 시각으로 독설을 퍼부었는데, 나를 포함해서 같이 있던 벗들 중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에 동의를 하지않자 무슨 심술이 났는지 갑자기 감정적으로 돌아서서 주제와 상관없는 내용으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 정부 때도 협회장을 하더니만 지금 또 협회장을 맡아서 하는군. 권력에 대한 해바라기라고 해야 할까? 저러다가 정치하더라.”

그렇다면 그 사람은 이노비즈 협회장이란 자리가 이 땅의 기술 혁신 강소 기업인들과 일자리를 구하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몸과 마음과 시간을 바쳐 봉사해야 하는 자리임을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다.

어쨌든 “정치에 뜻이 있는 것 아닌가”라는 말이 너무나 쉽게 남을 비난하는 의미로 남용되는 세상에서 오해를 받기도 싫고 ‘사랑’을 주제로 쓴 책의 내용에 대한 진실을 혹시라도 다르게 보는 시각이 있을까 염려되어 이 책은 2018년 지방선거가 끝난 후에 펴냈음을 밝힌다.


2018년 가을의 초입에서

성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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